창세기 49장은 야곱의 마지막 축복이자 예언의 장입니다. 이 장에서 야곱은 열두 아들을 불러 모으고, “후일에 너희에게 이를 일을 말하겠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아버지의 작별 인사가 아닙니다. 야곱은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이 약속의 계보 위에 무엇을 세우실지 선포합니다. 그 말 속에는 각 아들의 성품과 과거가 그대로 드러나고, 동시에 각 지파의 미래가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아들들을 “있는 그대로” 부른다는 점입니다. 그는 현실을 덮어주는 말로 끝맺지 않습니다. 르우벤의 불안정함,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성, 유다의 지도자적 부르심, 요셉의 고난과 열매, 베냐민의 강한 기질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드러남은 정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망가진 역사 안에서도 자신의 구원 계획을 계속 전진시키십니다. 창세기 49장은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실패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마지막 족장 말씀입니다.
또한 이 장은 그리스도를 강하게 비춥니다. 특히 유다에게 주어진 말 속에는 왕권과 통치, 그리고 열방이 순종하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단지 한 가족의 미래 설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따라가는 언약의 지도입니다.
성경 장 링크
https://goodchristiannetwork.com/bible/OpentheBible/GEN49.htm
창세기 49:1–2 의미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합니다. “너희는 모이라. 내가 후일에 너희에게 이를 일을 너희에게 말하리라.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은 두 번 “모이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모으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순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야곱은 자기 말이 가벼운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들을 “듣는 자리”로 세웁니다. 믿음의 유산은 물질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야곱은 마지막에 무엇을 남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흐름을, 아들들의 마음에 새기는 것이 가장 큰 유산입니다.
또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함께 등장합니다. 야곱은 흔들리고 약했던 과거의 이름이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씨름 가운데 새겨주신 새 이름입니다. 이제 야곱은 이 두 이름의 삶을 다 통과한 사람으로서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실패와 연약함이 있던 야곱의 길도, 하나님이 세워 주신 이스라엘의 길도 모두 포함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을 지키시는지 증언합니다.
창세기 49:3–4 의미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 그러나 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뛰어나지 못하리니, 네가 네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라.
야곱은 르우벤을 먼저 부릅니다. 장자에게는 원래 안정과 지도력이 기대됩니다. 야곱도 르우벤에게 “내 능력의 시작”이라는 존귀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르우벤의 치명적인 문제를 말합니다. “물의 끓음 같다”는 표현은 불안정함, 절제가 없는 흔들림을 뜻합니다. 르우벤은 순간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장자의 자리에서 기대되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책임은 혈통의 순서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리만 가진 사람에게 미래를 맡기지 않으십니다. 성품과 절제,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르우벤의 이야기는 “시작이 좋다고 끝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이 실패한 장자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끊지 않고 다른 길로 이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표: 르우벤에게서 드러나는 경고
핵심 단어: 물의 끓음
겉모습: 장자의 위풍과 권능
내면 문제: 절제 없는 흔들림
결과: 뛰어나지 못함
오늘의 교훈: 자리보다 성품이 책임을 지탱한다
창세기 49:5–7 의미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영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마음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노하여 사람을 죽이고, 분노하여 소의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들의 노함이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들의 분함이 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함께 묶어서 말합니다. 이들은 세겜 사건에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그들의 행동을 “의로움”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노함과 분함을 분명히 저주합니다. 특히 “내 영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라”는 말은 야곱이 이 폭력의 길을 단호히 끊는 선언입니다. 믿음의 가문 안에서도 분노는 쉽게 “정당한 분노”처럼 포장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폭력의 길이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흩으리로다”라는 말은 심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은 이 흩어짐조차도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십니다. 훗날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져 제사장과 예배의 섬김을 맡게 됩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과거를 그대로 칭찬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의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그 지파를 예배의 자리로 다시 빚어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와 거룩을 통해 사람의 방향을 바꾸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49:8–12 의미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송하리니,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렸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만민이 복종하리로다. 그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이 구간은 창세기 49장의 중심이며, 성경 전체의 메시아적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야곱은 유다에게 “형제들이 너를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놀라운 선언입니다. 유다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의 가문을 통해 왕권의 계보를 세우십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통치의 부르심이 유다 계통에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로가 오기까지”라는 말은 장차 올 한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한 분께 “만민이 복종한다”는 선언은, 단지 이스라엘 내부의 지도력만이 아니라 열방의 순종을 포함합니다.
유다를 “사자”로 부르는 표현도 깊습니다. 사자는 왕권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유다는 연약한 도망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자의 상징을 받습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우유, 풍성함의 이미지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지 물질적 번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 아래에서 누리는 풍성한 평안과 복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통치가 아니라, 풍성함과 회복을 가져오는 통치임을 보여 줍니다.
표: 유다에게서 드러나는 왕권의 핵심
찬송: 형제들이 인정하는 지도력
사자: 두려움 없는 왕권의 상징
홀: 지속되는 통치의 계보
실로: 오실 한 분을 향한 기대
만민의 복종: 열방까지 확장되는 순종
풍성함: 포도주와 우유로 표현되는 평안과 번영
창세기 49:13 의미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 이르리로다.
스불론의 축복은 위치와 사명에 관한 말입니다. 해변과 배 매는 곳은 교역과 이동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지파를 농경의 자리로만 두지 않으시고, 바다의 길과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자리로도 두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좁은 공동체로만 남겨 두지 않고, 주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를 두시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한 지파의 위치까지도 사용하셔서 공동체의 삶을 구성하십니다.
창세기 49:14–15 의미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겼고, 땅을 보고 아름답게 여겨서,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섬기는 종이 되었도다.
잇사갈은 “건장한 나귀”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힘과 성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짐을 메고 섬기는 종이 되었다”는 말은, 편안함을 선택한 결과로 섬김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모습을 암시합니다. 여기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성실과 근면은 귀하지만, 편안함만을 최고의 가치로 붙들면 결국 자유를 잃고 짐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좋게 여기는지”를 통해 삶의 방향을 드러내십니다. 잇사갈은 쉼을 사랑했지만, 그 쉼이 하나님 중심의 안식이 아니라 편안함 중심의 선택이 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여 줍니다.
창세기 49:16–18 의미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야곱이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에 대한 묘사는 강렬합니다. 단은 “심판”이라는 역할을 언급받지만, 동시에 “뱀”과 “독사”로 표현됩니다. 이는 교활함과 기습적 공격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힘과 지혜가 언제든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기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의 축복은 단순히 칭찬이 아니라 경고처럼 들립니다.
특히 야곱이 중간에 갑자기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기다린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축복의 무게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미래를 말하다가, 인간의 길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며,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열두 지파가 세워져도, 그 지파들의 죄성과 흔들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곧 메시아를 향한 갈망처럼 울립니다.
창세기 49:19 의미
갓은 군대에게 습격을 당하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에게는 싸움이 예고됩니다. 그러나 결론은 패배가 아니라 “추격”입니다. 이것은 고난이 있지만 꺾이지 않는 회복력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길에는 공격과 압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주십니다. 갓의 축복은 “처음 맞는 타격”보다 “마지막에 다시 일어서는 방향”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49:20 의미
아셀에게서 나는 음식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아셀은 풍성함의 축복을 받습니다. “기름진 음식”과 “왕의 수라상”은 공급과 섬김의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많은 것을 주시되, 그 목적이 자기만의 축적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고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데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풍성함은 자기 만족으로 끝나면 우상이 되지만, 섬김과 나눔으로 흐르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창세기 49:21 의미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말을 발하는도다.
납달리는 자유와 생동감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놓인 암사슴”은 묶이지 않은 힘, 민첩함, 자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말”은 말의 은혜, 표현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 다양한 은사를 두십니다. 누군가는 싸움의 자리에서 견디고, 누군가는 공급의 자리에서 섬기며, 누군가는 말과 표현으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색만을 가진 공동체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49:22–26 의미
요셉은 무성한 가지,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괴롭게 하며 쏘고 학대하였으나, 그의 활이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며, 전능자가 네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늘의 복과, 아래 깊은 샘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라.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뛰어나니, 영원한 산의 한계까지 이르리로다. 이 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가며,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로 돌아가리로다.
요셉에 대한 축복은 길고 풍성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의 삶이 단지 가족 이야기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사람을 세우시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부릅니다. 샘 곁이라는 표현은 요셉의 열매가 상황의 편안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붙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감옥과 오해와 배신을 통과했지만, 그 가지는 “담을 넘었습니다.” 하나님이 막힌 경계를 넘어 확장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괴롭게 한 사람들을 “활 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요셉은 실제로 많은 화살을 맞았습니다. 형들의 미움, 노예로 팔림, 거짓 고발, 긴 기다림이 모두 요셉을 향한 화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활이 도리어 굳세다.” 요셉이 강해진 이유는 성격이 강해서가 아니라,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의 손”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강함은 하나님에게서 온 강함입니다.
또한 요셉에게 주어지는 복은 위와 아래, 생명과 공급 전반을 아우릅니다. 하늘의 복, 깊은 샘의 복, 젖과 태의 복은 생명의 확장과 보존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집을 통해 이스라엘을 살리고, 그 집을 지파의 큰 기둥으로 세우십니다.
표: 요셉 축복의 흐름
고난: 활 쏘는 자들이 괴롭게 함
지탱: 전능자와 반석과 목자의 손이 붙드심
결과: 활이 굳세고 팔이 강해짐
열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확장됨
복의 범위: 위의 복, 아래의 복, 생명과 번성의 복
창세기 49:27 의미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은 강한 전투성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이리”라는 표현은 거칠고 공격적인 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무조건 부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지파는 전투와 방어의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힘은 잘못 사용되면 파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의 강함은 “하나님 아래에서 길들여질 때” 공동체를 보호하는 힘이 됩니다. 강함 자체가 죄가 아니라, 강함을 어떤 주인에게 드리는지가 결정적입니다.
창세기 49:28–33 의미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여 축복하되, 각 사람을 따라 적당한 복으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이 또 그들에게 명하여 말합니다. “내가 내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장사하라.” 그 굴은 막벨라 굴이며,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레아가 거기 장사되었고, 야곱이 그곳을 상기시킵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침상에 발을 모으고 숨이 거두어져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49장은 축복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야곱의 장례 명령과 죽음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절망의 결말이 아니라, 언약의 확정입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살았지만, 애굽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상들과 함께 막벨라 굴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속한 사람이다”라는 마지막 고백입니다. 야곱의 몸은 애굽에 있었지만, 그의 소망은 약속의 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을 따라 적당한 복”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한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집의 아들들이지만, 하나님은 각자의 길과 역할을 다르게 세우십니다. 누구에게는 경고가 있고, 누구에게는 왕권이 있고, 누구에게는 풍성함이 있고, 누구에게는 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다양한 부르심으로 구성하셔서, 전체가 함께 서게 하십니다.
창세기 49장의 큰 주제
창세기 49장은 “말씀으로 끝을 맺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야곱은 인생을 돌아보며 아들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죄와 상처를 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죄와 상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축복은 인간의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위에서 선포된 미래입니다.
이 장의 흐름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가문을 통해 왕을 세우시고, 고난당한 아들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시며, 마지막에는 메시아의 길로 역사를 몰아가신다.
표: 창세기 49장의 핵심 메시지
현실 진단: 죄와 성품의 문제를 숨기지 않음
언약 지속: 실패가 있어도 약속은 끊기지 않음
왕권 예언: 유다에게서 통치의 계보가 세워짐
고난의 열매: 요셉의 상처가 살림의 통로가 됨
최종 소망: 애굽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속함
창세기 49장 속의 그리스도
이 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비추는 곳은 유다의 축복입니다. 홀과 지팡이, 만민의 복종이라는 언어는 단지 다윗 왕조만을 가리키는 말로 끝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더 큰 왕, 더 넓은 순종, 더 깊은 평안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경의 흐름은 유다의 계보에서 다윗이 나오고, 그 계보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성됩니다. 유다의 축복은 메시아의 왕권을 향한 가장 초기의 강한 예언 중 하나처럼 서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중간에 고백한 것은, 열두 지파의 미래를 말하면서도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외침입니다. 지파가 세워져도 죄는 남아 있고, 역사 속에 위험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결국 하나님이 보내시는 한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그리스도를 향한 기다림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요셉의 축복도 복음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상처받은 자가 쓰임 받고, 배신당한 자가 살리는 자가 되고, 낮아진 자가 높아져 많은 사람을 먹이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길과 닮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죽음 같은 길을 통해 생명으로,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창세기 49장을 오늘 살아내는 길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다루신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말은 죄가 덮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의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어 무너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어 돌이키게 하시려는 분이십니다.
둘째, 우리의 미래는 타고난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은혜의 길로 결정됩니다. 유다의 왕권은 “완벽함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구원 계획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경쟁이 아니라 순종이며, 자리 다툼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르는 겸손입니다.
셋째, 고난은 끝이 아니라 열매의 자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요셉의 축복은 상처가 삶을 끝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면, 활 쏘는 자들의 화살 아래에서도 활이 굳세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이 되시면, 상처는 쓴 뿌리가 아니라 살리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마지막 소망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은 애굽의 안정을 누렸지만, 약속의 땅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현실의 자리에서 살아가지만, 소망의 방향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가 우리의 집입니다.
표: 오늘 적용의 방향
분노와 폭력: 정당화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다루기
성품의 흔들림: 자리보다 절제를 선택하기
고난의 화살: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아 견디기
미래의 길: 내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기
최종 소망: 애굽 같은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닻 내리기
Keep Exploring God’s Word on This Theme
창세기 47:1–31 연구
https://goodchristiannetwork.com/2026/01/17/a-study-in-genesis-471-31/
창세기 48:1–22 연구
https://goodchristiannetwork.com/2026/01/17/a-study-in-genesis-481-22/


Leave a Reply